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훙커우 공원 의거 (문단 편집) === 장제스 연구 이후 === 한국과 중국은 각자의 입장 때문에 윤봉길의 폭탄 투척과 한중 항일연대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배경한 교수는 2017년에 투고한 자신의 논문 <윤봉길 의거 이후 蔣介石 ·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지원과 '長期抗戰'>에서 기존의 인식이 결과론적이며 실증적 검토 없이 퍼져 당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실상과 본의를 가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장제스 일기, 국민당 내부논의와 당시 최신 연구로 규명된 사실에 근거한다. 윤봉길 의사가 대단한 일을 해냈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20세기 초 [[한중관계]]에 대한 이해와 직결되므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가 의거에 감동 받고 이를 찬양했다"거나 "결과론적으로 독립에 기여했다"는 것에서만 머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서방 언론의 일차적 반응은 '비인도적 폭거'라거나 '반인륜적 만행'이라는 식의 비판을 제기하면서도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일본군의 해외침략에 있다는 점도 지적하는 [[양비론]]적 수준이었으며 일면저항 일면교섭, 장기항전론을 대일 전략으로 잡은 [[중국국민당]] 정부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지극히 불행한 처사'라거나 일본인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한편 외교적 위문에 나섰다. 이는 국민당 정부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간 정전협상을 통해 상해사변의 조속한 해결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국민당 정부는 한편으로는 오히려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인해 일본의 침략전쟁이 재개되지 않을까 강하게 우려했으며 중국의 책임이 아님을 강조했다. 당시 중국 관영 언론들도 신중하긴 마찬가지였으며 상하이일보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양면적이었다. 물론 중국인들은 내심 일본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외교적 수사의 왕래에도 불구하고 훙커우 공원 사건이 일반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장제스가 "중국의 100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 1명이 이뤄내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한 적이 없다.''' 장제스는 일기장에 “옛날 [[사마천]]은 다른 사람에게 원한을 산 개인도 (그 정도가) 정말 심하다고 할 텐데 한 국가의 원수가 되어 원한을 산다면 (그 정도가) 함께 살 수 없을 정도라 했다"면서 "무력을 남용하며 침략을 좋아하는 자들 또한 (이번에) 뉘우치는 바가 있을까?”라고 적었을 뿐이다. "30만 (혹은 100만) 중국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일개 한국인이 해냈다"는 문구는 『 上海日報』 등 1932년 5월 2일 중국 언론보도에서 발견되는데 이를 장제스가 말했다는 식으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년 뒤인 1933년 봄에 이루어진 김구와 장제스의 면담 내용에서도 이런 격찬과 감동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장제스는 김구가 제안한 특무공작을 거부하며 "천황을 죽이면 또 다른 천황이 있고 대장을 죽이면 다시 대장이 나타날 것이다. (그보다는) 장래 독립을 도모하자면 무인을 양성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물론 험악한 분위기에서 이런 말이 오간 건 아니고 김구와 장제스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제안은 정중히 거절되었다. 줄여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윤봉길의 희생은 만보산 사건 등으로 악화되고 [[친일반민족행위자|조선은 일제의 앞잡이로 온갖 더러운 일을 하며 일제랑 하등 다를 바 없다]][* 피지배 민족에게 더러운 일을 맡기고 내부분열을 조장하여 지배하기 쉽게 만드는 건 제국주의 국가들의 [[분할통치|흔한 패턴]]이었다.]며 폄하하던 중국의 언론을 바꿔 침체된 한중 민중 간의 분위기를 풀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일본 제국에 저항하고 있음을 전세계에 다시 확인시켜 주었으며 대표성을 상실해가던 임시정부 세력의 숨통을 틔워 중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정작 중국 정부와 장제스는 자신들의 상황 때문에 이 사건에 즉시 적극적으로 찬동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한 것은 장기항전 전략에서 중요한 동북지역에 한인들을 동원하기 위함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중화 국제질서 부활"이 목적이었다.[* 즉, 한반도에 친중, 반공 성향의 독립국을 세워 일본을 견제하고 아편전쟁 이래 무너진 중화 질서를 복구시키려고 한 것이다. 비록 국민당 정권이 대만으로 쫓겨나면서 그 꿈을 이루지 못했으나 새로이 세워진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최종 목표는 중화질서의 복구다.] 그나마 김구와 장제스의 친분 덕에 이만큼의 지원이라도 얻어낼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항일전쟁 시기 중국과 한국 양측에서 강조해 온 “항일(반제국주의)을 위한 동아시아인들의 연대(中韓互助)”와 “동아시아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면모였다는 점과 함께 그것이 가지는 한계성도 분명하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